통일 후 중대 왕권(中代王權)에 의한 전제정치로 정치. 회·문화 모든 면에 걸쳐 전성기를 이루었던 신라도 하대에 이 서면서 점차 기울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진골 내부의 부여로 왕위쟁탈전(王位爭奪戰)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중대의 전제왕권이 한계점에 도달하게 된 경덕왕(景德王)은 정치개혁을 단행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귀족세력의 경제적 기 반으로 기능하였던, 신문왕(神文王) 9년(689)에 폐지한 복습까지 부활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는 정치체제의 개혁이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고, 오히려 정치적 혼란만 더해졌다.
신라사회 자체가 지닌 한계성과 모순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서 중앙정치세력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혜공 왕(惠恭王) 때의 대란(大亂)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혜공왕은 90 각간(角干)의 내란과 같은 방계 귀족(系貴族)들의 반란으로
살해되고 중대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 선덕왕(宣 게 귀족들이 왕위에 오르기 시작하였는데, 그때부 거수 왕(敬順王) 때까지를 신라하대라고 한다. 하대의 20명의 왕이 교체되고 그 대부분이 반란으로 희생된 것은 이 시기의 정치적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법에 이러한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적(專制主 生的) 경향에 대한 귀족들의 반항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다.
그 결과 하대의 신라는 귀족연립적(貴族聯立的)인 방향을 걷게 되어 이제는 왕이라 하더라도 귀족 전부의 대표자일 수는 없었 다. 그를 추대한 일파의 대표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집사 부의 시중 대신에 상대등이 다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하대에 와서는 중앙귀족간의 대립과 항쟁이 본 격적으로 일어났다. 귀족들의 막대한 재부(財富)와 사병(私도) 이 정권 쟁탈전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이제 왕위는 혈통에 의 해서가 아니고 실력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김지정(金志貞)의 난에 의해서 혜공왕이 살해되었고, 김지 정의 난은 김양상(金良相)에 의하여 진압되었고, 김양상은 혜 공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37대 선덕왕이 되었다.
김양상 은 내물왕(奈勿王)의 10세손이다. 이어 내물왕의 12대 후손인 김경신(金敬信)이 즉위하였는데 이가 곧 원성왕(元聖王)이다. 그 후에는 모두 원성 왕계에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성 왕계의 왕위 독점에 대하여 강한 반발을 보인 것이 헌덕왕(憲德王) 14년(822)에 공주에서 일어난 김헌창(金憲昌)의 난이었다.
그것은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이 무열왕의 직계손으로 선덕왕에 이어 왕위에 올라야 하였는데, 김경신이 비상수단으로 원성왕에 오른 데 대한 불만으로 폭발한 것이다. 이러한 왕위 싸움은 흥덕왕(興德王)이 죽은 후 종제(從前 김균정(金均貞)이 왕궁으로 들어가 왕이 되려 하였으나 균전, 조카 제융(悌隆)이 무력으로 그를 꽂아 내고 왕위에 올라 희가 왕(魯康王)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희강왕을 즉위케 허 상대등 김명(金明)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스스로 목 매 죽게 하고 왕이 되니 민애왕(閔哀王)이다. 이때 청해진(淸海 鎭)의 장보고(張保皐)에 의지하고 있던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 祐徵)이 장보고의 원조를 받아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神武王)이 되었다. 이와 같이 신라 하대에는 진골 귀족 사이에 왕위를 둘러싼 자기 항쟁이 전개되어 정치와 사회는 혼란을 더해 갔던 것이다.
서로 당 역을 진골귀족의 왕위 쟁탈싸움은 그들 진골 내부의 분열을 뜻하 는 것이었다. 같은 김 씨 왕족이지만 이제는 족당에 따라 서로 대립하고 왕위를 둘러싼 싸움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골품만으로 정치적·사회적 출세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실력에 의해서 좌우되는 사회로 변해간 것이다.
이와 같은 골품제의 붕괴는 사회의 발전에 따른 것이다. 신라 사회의 개방과 확대는 고대적이며 혈연적(血緣的)인 골품 제도의 존속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며, 또 6두품 계열의 진골귀족에 대한 도전은 골품제의 해체를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6두품 계열은 신라사회의 지배층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국학(國學)이나 입당유학(入唐留學) 하어 고도의 지식과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배양하여 국가의 관서 행정실무에 능해서 신라 중대까지만 하더라도 왕권 가료로 아너라도 왕권과 잘 부합되어 중간 관료로서 만족하였다.
그러나 진골체제하에서 이들의 활동은 언제나 제약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유교 지식을 가고 능력이 있는 6두품 출신들이 현실에 불만을 품고 체제에 대해서 비판을 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부터 무조건 반발한 것이 아니라 최치원 (崔致遠)이 정치개혁안인 10조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한 것에 서 보는 바와 같이 현제의 모순덩어리인 구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유교적인 정치체제로 개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귀족들은 이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지방의 하급 친족 공동체(下級親族共同體) 의 세력들은 중앙귀족과의 연결을 끊고, 중앙에 대한 반항세력 을 이루어 중앙의 상급친족공동체(上級親族共同體)와 지방의 하급친족공동체 사이에 성립되었던 축대 관계 내지 종속관계는 파괴되었다.
이렇게 하여 지배체제를 구성하였던 골품제도는 이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중앙정부의 지방지배는 크게 약 와되었다. 이리하여 진성여왕 이후에 와서는 새로운 지방세력이 대두하여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곧 진골 체제 가 해체되고 신라사회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다.